아침에 일어나 산책을 했다. 깜깜한 밤에 만난 동네이므로 난 이 동네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다.
지하철역도 어디인지 모르고 내가 정확히 시내의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며 이 동네가 얼마나 안전한가 혹은 위험한가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또 한 번 고민을 한다. 이 동네에서 산책을 하는 게 괜찮은 일일까?
예전에 누구한테 들은 얘긴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뉴욕에서 유학했던 한 한국인 학생의 이야기가 있다. 이 학생은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할렘가에 집을 구할 수밖에 없었고, 매일 같이 지나다니는 등하교길이 무서웠다고 한다. 밤새 고민한 끝에 그가 결정한 것은 점퍼 속에 손을 넣고 다는 것인데, 바깥으로 권총 모양이 살짝 나도록 했다고 한다. 그렇게 바짝 긴장하며 손을 찔러 넣고 권총 모양을 하고 다닌지 두어달. 등하교길이 나름대로 '안정'이 됐고 또 동네의 룰들을 알게 되었단다. 그러던 그가 처음으로 동네에 있는 상점에 들어가서 손을 내밀려고 하자, 주인 아저씨가 갑자기 두 손을 모두 들었단다. 그도 모르는 사이 그는 동네에서 '권총 들고 혼자 다니는 애'로 소문이 돌았다 한다.
'위험'이란 항상 그런 거다. 내가 위험을 인지하여 보이는 행동에 타인 또한 반응하며 결국 서로의 '위험'은 높아져간다. 그래 놓고 이상한 결과가 탄생하면 결국 상대로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유스호스텔 주변을 산책하려 했을 때 나도 점퍼에 총 모양으로 손 만들어서 살짝 도드라지게 만들고 걸어 다녀볼까 생각했다. 그러다 제대로 '브로'를 만나면 인생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마음은 접었다.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나중의 결과는 가장 걱정되는 옵션이기 때문에. 결국 '관찰'을 하기로 했다. '관찰'만큼 훌륭한 무기는 없거니와 또 산책 내내 호주머니에 총모양으로 손을 만들고 있는 것도 힘들 것 같기도 했다.
관찰을 통하여 동네의 안전 정도를 어떻게 정하지라고 생각하다가 문득 쉬도 때도 없이 조깅하는 백인들이 생각 났다. "그래 5분동안 세 명 이상이 조깅을 하면 이 동네는 나돌아 다니기 괜찮은 동네일 거야."라는 판단 기준을 만들었다. 하긴, 무서우신 분들은 밤에 활동을 많이 하시니 이 새벽 같은 아침엔 취침에 곧 들어서 괜찮을 거라 생각도 들었다. 근데 나 너무 겁이 많긴 하다.
역시 어딜 가든 조깅부터 해대시는 백인들이 쏟아져 나와 주시는 바람에 나돌아 다니기로 했다. 연희동에서 참 이상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어떤 백인이 쓰레기차 뒤를 계속 따라가면서 조깅을 하는 것이었다. 길을 바꾸거나 살짝 쉬어 가면 그 '향기'를 안맡아도 되는데, 그 백인은 꿋꿋이 쓰레기차를 따라갔다.
한 블록 걸어 나오니 뭔가 휑했다. 옆에 있는 카페는 휴일이라고 문을 안 열고, 구멍가게 인도 아저씨는 계속 "하와유? 하우즈 유어 할리데이?"라고 물어서 "오~ 땡큐. 그레이트, 하우어바웃유?"라고 대답하자 이 사람 토킹 어바웃에서 작정하고 컨버세이션으로 넘어 가려고 해서 빙긋 웃으며 "해브어 나이스데이"라고 날려주고 도망쳤다.
그 옆에 문닫힌 서점이 하나 있는데, 이름이 버클리 서점이었다. 깔깔 거리고 있었는데, 앞을 보니 'Berklee College of Music"이라고 써 있는 건물이 있다. 허거덩! 진짜 여기가 '버클리 음대'였구나! 버클리 서점이 아니었구나. 그 주변을 돌아 다니면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윤상도, 김동률도 그리고 양파도 이 거리를 지나다녔겠지? 쿠훗.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그냥 어떤 사람을 따라가보기로 했다. 미드에 나오는 스파이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으면서... 이 동네에 뭐가 있는지 모르니깐 좀 착하게 생긴 사람이 어디 가나 따라가봤다. 몇 블록을 걸어 가니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로 간다. 모두다 이른 아침이어서 문이 닫혔지만 무슨 가게가 있나 나도 둘러 보다 길을 잃었다. 대충 골목을 돌아 다니다가 길을 찾아내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Hartford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사우스스테이션으로 갔다.
인터넷 예매해서 발권을 하려는데 기계가 멈췄다. 아저씨를 불렀다. "애가 워낙 더디니깐 걱정하지 말고 좀 기다려. 얘가 하도 버벅 대서 하루에 몇 번은 리부팅 해줘야해. 네꺼 발권되면 껐다 켜자"라고 해서 하염없이 티켓을 내 주기를 기다렸다. 내 인생에서 티켓을 발권할 날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답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키오스크기는 매가리가 없었다. '프린트 중입니다'로 뜨고나서 5분이 지나서 티켓이 나왔으니 말 다한 거다. 아저씨는 열쇠로 기계를 열어내어 또 부팅을 하기 시작했다. 하긴, 여기는 '미국'이지. 모든 느린.
버스 타기 전 시간이 두어시간 가까이 남아 샌드위치 런치 박스를 시켰다. 알아 들을 수 없는 어떤 말로 말을 하길래 "이탤리언 샌드위치!!!"라고 말했더니 이 언니 또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 거린다. 손가락으로 옆을 가르키길래 봤더니 냉장고에서 샌드위치를 하나 가져 오면 그 언니가 음료수랑 과자칩, 쿠키를 챙겨 주는 시스템이었다. "우후훗 디스이즈 더 퍼스트 타입 포 미 투 오더 어 샌드위치. 소 아이 헤브 노 아이디어~ 쏴리" 언니가 웃는다. 이 언니만 웃는 게 아니다.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이 웃는다. 크게 웃는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김애란의 소설 "침이 고인다"를 읽었다. 김애란의 어떤 삶의 경험이 나와 비슷한 구석이 적잖이 있음을 느낀다. 쓰는 단어와 언어들도 너무도 익숙한 것들이다. 문장 표현도 내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술 먹으면서 했을 법한 기발한 문장들이 많다. 미친 사람처럼 깔깔 대기 시작했다. 샌드위치 직원은 정말로 내가 미친 것을 확인한 듯이 지긋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에 탔는데 잠이 들었다. 한국으로 치면 새벽 4시쯤이었으니 한참 잘 시간이다.
일어나니 2시간 40분 정도 지나 목적지인 하트포드에 도착했다. 내가 깨자 사람들이 또 웃는다. 옆 줄의 10대 백인 청소년은 "너 술 취했어?"라고 한다. 아... 코 골고 잤구나 ㅠ.ㅠ 시차 적응도 아직 안됐고 유스호스텔에서도 못잤으니... 아 창피하다. 사람들이 내릴 때까지 얼굴을 점퍼에 묻고 다 내릴 때까지 나가지 않았다. 얼굴은 분명 빨개졌을거다.. 좀 깨워주지.
지은씨 부부가 마중을 나왔다. 지은씨는 교포로 UC Davis에서 문화연구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주제는 한국의 스타벅스. 필드웍을 나왔을 때 알게 되어서 종종 연락을 주고 받았다. 지은씨네 부모님이 계신 코네티컷주의 브리스톨이라는 동네에서 일리노이대에서 인류학 박사과정을 하는 윤정과 다 같이 만나기로 했다. 윤정은 마이애미에서 실컷 놀다 오는 중이었다. 그렇게 CSI를 보고도 라스베가스와 마이애미를 안 무서워하는 거 보면 이 사람들이 용감한 건지 아니면 무모한 건지를 잘 모르겠다.
지은씨 부부와 윤정을 픽업하러 공항에 갔다. 내 옆에서 어떤 백인 꼬마 아이가 지 스텝에 꼬여 넘어졌다. 그 옆의 엄마가 일으키면서 나를 쫙 째려보고 훽 가버렸다. 아!!!! I didn't do that! 이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다. 젠장젠장젠장젠장젠장젠장. 왜 저 자식은 내 옆에서 넘어져서... 코네티컷은 백인 동네라 하더니, 공항에서 1시간 동안 기다리는데 흑인 3명, 아시아인 2명을 본게 전부였다. 왜, 립스틱 정글에서 나오는 그 분 -24에서는 잭 바우어의 여자친구이자 국방부 장관의 딸인 '오들희'여사로 나왔다가 립스틱 정글에서는 잡지 편집장으로 나오시는.. 그 분이 사실 태생은 '브룩클린'인데 사람들은 자기를 '코네티컷' 출신으로 안다고 하는 대사가 기억 났다. 중산층 부루조아 백인이 코네티컷인가? 지난 대선에서 이 동네는 누구를 지지했을까가 궁금해졌다.
얕은 언덕에 지어진 큰 집! 나홀로 집에 같은 곳에서 나오는 집 같았다. 근사한 저녁을 먹고 신생아랑 놀다 10시쯤 잠깐 누웠는데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러고는 새벽 5시에 깼다 ㅡ.ㅡ;;
나 좀 깨워주지....
자기들끼리만 놀고.
12월 26일 코네티컷 브리스톨.
Posted by Q-Ho